마틴 루터 킹 | \”마틴 루터 킹\”의 탄생일은 미연방 공휴일이 되었다. 109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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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을 통해 1960년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사회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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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 나무위키

미국의 비폭력주의 흑인 민권 운동가이자 개신교 침례회 목사로 통칭 킹 목사로 불린다. 미국에서는 이니셜인 MLK라고 쓰기도 한다. 1964년 노벨평화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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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8/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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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주니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1964년 노벨 평화상 수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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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9/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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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영어: Martin Luther King, Jr. Day)은 미국의 연방 공휴일로, 1월 셋째 월요일이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를 기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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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0/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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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인종 평등의 시대를 꿈꾼 지도자, 마틴 루터 킹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수백 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미국의 인종 평등에 큰 진전을 가져다준 비폭력 민권운동 지도자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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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voakorea.com

Date Published: 6/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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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 VOA 한국어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29년 1월 15일, 미국 남부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에서 침례교 목사인 마틴 루터 킹 시니어와 어머니 앨버타 윌리엄스 킹 사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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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voakorea.com

Date Published: 11/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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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 링컨 기념관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963)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에 서명 한지 약 1백 년 되는 1963년 8월28일 마틴 루터 킹이라는 이름의 한 청년이 미국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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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usembassy.gov

Date Published: 9/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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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마틴 루터 킹 데이 – VOA Editorials

인도의 간디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킹 목사는 민권 운동을 이끌면서 6개의 원칙을 만들어 집단적 보이콧, 평화 시위같은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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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ditorials.voa.gov

Date Published: 1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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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의 탄생일은 미연방 공휴일이 되었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틴 루터 킹

  • Author: EBS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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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9. 2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qKJsbDJnfJU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마틴 루터 킹 주니어(영어: Martin Luther King, Jr. 마틴 루터 킹 2세[*] , 1929년 1월 15일 ~ 1968년 4월 4일)는 미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 흑인 해방 운동가, 권리 신장 운동가, 기독교 평화주의자로, 미국내 흑인의 인권 운동을 이끈 개신교 목사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개요 [ 편집 ]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교회에 부임하였다. 1955년 12월 몽고메리 시립 공영 버스의 흑인 좌석차별 사건 이후,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버스 보이콧 운동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이끌어 1년 만에 범국민적 지지를 얻어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흑인 해방 운동 및 흑인 인권 운동을 주도했다.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을 비롯한 많은 흑인 관련 운동과 인권 운동을 이끌어 법률과 제도의 수정, 공민권법, 투표권법의 개정과 흑인의 권리를 증진했다.

1960년대에 흑인 권리 운동과 인권 운동을 통해 일정의 법률적인 결과를 획득하였고,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동참하였다. 그는 맬컴 엑스의 폭력주의 노선에 반대하고 비폭력적인 저항 운동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테네시주의 흑인 미화원 파업운동을 지원하러 내려갔다가 멤피스에서 흉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경찰은 북부 출신의 백인우월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1964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40년~1944년: 부커 T 워싱턴 고등학교 (졸업)

1944년~1948년: 모어하우스 대학교 (학사)

1948년~1951년: 크로저 신학대학교 (석사)

1953년~1955년: 보스턴 대학교 (박사)

생애 [ 편집 ]

출생과 가계 [ 편집 ]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의 침례교 목사 마이클 루터 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는 아버지 마이클 목사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지만, 아버지가 1935년 마틴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마틴이 이름이 된다.[1] 할아버지 제임스 킹 역시 침례교회 목사였다.

그의 아버지쪽 선조들은 아일랜드인과 아프리카인의 혈통이 섞인 아이리시-아프리카 계열 흑인이었다.[2] 증조부 나댠 번햄(Nathan Brannum)은 침례교 목사가 되었고, 증조부 나댠 번햄이 성씨를 킹(King)으로 하면서 그의 집안 성씨는 킹이 되었다. 한편 어머니 쪽으로는 부분적으로 백인의 혈통을 타고났는데, 어머니의 할아버지 윌리엄 넬슨 윌리엄스(1804 ~ 1863)와 어머니의 증조부 윌리엄 윌리엄스(1772 ~ 1835)와 레이첼 넬슨 (c.1774 ~ 1851)는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백인이었다.

아버지 마이클 루터 킹은 침례교회 목사이다. 증조부 때부터 침례교 목사였고 3대째 침례교회 목사였지만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자 백인들에게 멸시와 폭행을 당했고, 어릴적부터 그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성장, 인종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신념을 어릴 적부터 품게 되었다.

유년기 – 청년기 [ 편집 ]

경찰의 인종 차별에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항의하는 부친의 실천은 어린이였던 루터 킹에게 옳지 않은 것을 보면 굴종하거나 침묵하지 말고 항의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3]한국삐아제에서 출판한 《마틴 루서 킹 목사》 전기에 따르면, 경찰이 부친에게 “어이, 꼬마. 운전면허증을 보여줘”라고 하자, “꼬마는 여기 있는 아들입니다. 면허증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꾸하였고, 그 말을 듣고 경찰은 자신의 무례함을 부끄럽게 여겨서 물러났다고 한다.

소년 시절에 그는 침례교회에 다니면서도 기독교의 교리에 회의적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다가 13세 되던 해 부활절에 침례교회의 주일 학교에서 그는 “의심을 버리고 가차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성서에는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신학교 진학을 결심한다.

그는 9학년과 12학년을 월반하여 15세 되던 해에 모어하우스 대학 신학과에 입학,[4] 모어하우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주 체스터의 크로저신학교를 수료하였다. 대학교 재학 중 넉넉한 가정환경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았지만, 흑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신학교를 마친 뒤 다시 매사추세츠주로 건너가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인권, 사회 활동 [ 편집 ]

사회 부조리 해결에 참여 [ 편집 ]

1955년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신학부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 ”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5]

박사학위 재학 중 그는 주일학교때 학력이 낮은 교사들에게 배운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신앙에서 기독교적인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진보적 신앙으로 신앙성격이 바뀌게 된다. 한편 주일학교에 나가 흑인 및 빈민가의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후 보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권 운동 [ 편집 ]

마틴 루터 킹 2세의 초상화

1954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애버뉴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맡게 된다. 당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침례교회에서 목사안수는 받았지만, 모어하우스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회와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다. 1955년 백인들은 ‘몽고메리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에 흑인은 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려고 하였고, 그는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던 중 1955년 12월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여성이 버스에서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시 경찰서에 체포, 연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 지도자들이 봉기하여 몽고메리 시내버스업체들을 상대로 보이콧 운동을 기획했다. 킹 목사는 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받아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함께 운동을 이끌었다. 보이콧 운동을 통해 수천 명의 흑인과 백인이 버스 이용을 거부했고, 시민들은 카풀을 조직하고 도보로 이동했다. 보이콧 운동은 계속되자, 시내버스업체들은 재정적으로 크게 손해를 보았다.[4]

킹 목사는 참가자들에게 흑인 해방 운동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시위자들 및 그 지지자들은 불평등한 제도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에게 지속적인 위협과 공격을 받았으며, 시위자 가운데 상당수가 체포되고 구속됐다. 킹 목사의 사택에도 폭탄이 날아들었다. 다행히 아내와 자녀들은 무사했다.[4]

이윽고 1956년 12월에 미국 연방 대법원이 버스 내 인종 분리법의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마침내 381일 만에 몽고메리 시내버스 보이콧 운동이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4] 이후 그는 애틀랜타의 침례교회 목사로 있으며 미국 각지의 인권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마틴 루터 킹 2세와 같이 인종차별반대운동에 참여한 동역자로는 장로교 목사인 윌리엄 슬로언 코핀(1924년-2006년), 침례교 목사인 랠프 애버내시(1926년-1990년) 등이 있다.

앨러배마의 시내버스 보이콧 운동을 통해 미국의 인종 불평등과 킹 목사의 지도력에 국제적인 이목이 쏠리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킹 목사는 이 운동을 선두에서 지휘하였고, 국제적으로는 흑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진영의 대표 인물로 여겨졌다.[4]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 활동에 대해 그는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1958년)이라는 책을 통해 보고서 형식으로 남기기도 했다. 1957년 미국 남부의 흑인을 차별하지 않는 목사 및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남부기독교지도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의 조직, 결성에 참여하였다.[4] 그는 비폭력주의를 끝까지 고수하였다. 그러나 맬컴 엑스 등은 그의 운동이 지나치게 타협적이라고 비토했다. 일부의 흑인 과격파는 흑인 이슬람 지도자인 엑스를 지지하며 그의 비폭력 흑인운동에 반발했는데, 왜냐면 그들에게 온건한 성격의 흑인 인권 운동은 백인들과의 타협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투옥, 석방, 워싱턴 대행진에서의 연설 [ 편집 ]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63년 4월 12일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열린 항의 데모 때, 스스로 버밍험 시 경찰에 찾아가 체포되었으며, 4월 19일까지 구치소의 독방에 투옥되었다. 같은 해 8월 워싱턴 DC에서 열려 약 2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 때 집회의 연사로 참여하여,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인종 차별의 철폐와 각 인종 간의 공존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간결한 문체와 평이한 말로 호소해 넓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 — 연설문 I Have a Dream 중에서

이 연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유명하다. 이후 여러 지식인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인종 차별 철폐 운동에 비흑인 지식인들도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인권 법안과 차별 금지 법안 통과의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노동 운동 참여 및 정부의 사찰 [ 편집 ]

킹은 흑인 차별 철폐운동 외에도 인종차별 철폐, 노동 운동, 시민 권익 운동에도 참여, 이를 후원하였다. 킹은 노동자들이 노동기본권인 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으로써 자본가와 투쟁하는 계급투쟁 곧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멤피스의 흑인 청소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이자,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하였다.

“ 자신이 지닌 엄청난 자원을 빈곤을 종식시키고,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기본적인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역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노동자로서의) 평등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적절한 임금을 받고 싶다면 투쟁해야 합니다. ” — 마틴 루터 킹 2세

그의 활발한 사회운동은 미국의 인종 차별주의자 외에도 미국의 우파와 정부 인사들까지 자극하여, 당시 FBI 국장이자 우파인사였던 존 에드거 후버는 흑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킹을 위험 인물이라고 규정하여 활동 내역을 감시하였다.

한편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 장면 중 존 F. 케네디의 아내 재클린 케네디가 무릎을 꿇고 관의 중간 부분에 키스를 하는 부분을 본 뒤 그는 ‘음, 이 부분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지’라고 성적인 농담을 한 것이 재클린의 귀에 들어가게 됐다. 존 F. 케네디의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한 말실수가 재클린 케네디의 귀에 들어가면서 재클린은 그의 사생활에 대한 폭로와 위선자라는 기록과 녹음을 남기게 된다.

생애 후반 [ 편집 ]

반전 운동 [ 편집 ]

그는 1963년부터 베트남 전쟁에의 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에도 동참했다. 그는 무의미한 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서 희생시킨다는 점과 베트남 국민들을 학살한다고 지적했다.

“ 지금 미국 청년들이 아시아의 정글에서 전투를 하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너무나 막연하기 때문에 전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들의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이공 정권과 그의 동맹세력도 명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미국 흑인 병사들은 민주주의를 누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1964년 10월 14일, 미국의 인종 차별을 끝내기 위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다. 그 후,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목소리를 냈다. 또한 베트남인들의 운명은 베트남인들에게 맡겨야 된다며 미국의 개입은 부당하고, 죄없는 미국 청년들의 피를 헛되이 쏟는 것이라며 전쟁을 비판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반전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킹은 흑인 민권 운동 외에도 베트남 전쟁의 폭력성을 지적하며 반전운동 등도 함께 추진해 나갔다. 그는 1963년 타임 선정 올해의 인물에 지정되기도 했다. 1964년 초 예일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가톨릭 인종협력회의로부터 존 F.케네디 상을 수상받았다.

노벨상 수상 전후 [ 편집 ]

1964년 10월 14일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50년 동안 FBI 국장으로 8명의 역대 미국 대통령을 정보 정치와 공작 정치로 벌벌 떨게 만들었던 에드거 후버에게, 급성장한 킹은 위험인물이자 제거 대상이었다.[6] 에드가 후버는 64년 10월 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자 분노하였다.[6] 한편 후버는 사람들을 고용, 그가 여러 여성들과 성관계를 하는 장면을 녹화, 사진 촬영하여 각 미국의 각 신문사에 보냈다. 그러나 이를 보도한 신문사는 없었다. 오히려 후버에게 치졸하게 남의 뒤를 캔다는 야유가 돌아왔고, 후버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1964년 11월 18일 후버는 기자들을 FBI 사무실로 초청, ‘욕을 했다.인터뷰 도중 “킹은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거짓말쟁이이며 가장 비열한 사람 중 하나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1963년 8월 28일 연설을 전후하여 킹 목사는 위싱턴 윌러드 호텔(Willard Hotel)에 투숙하였다. 이 때에도 호텔에는 FBI의 도청 장치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후버는 킹 목사가 친구와 함께 창녀들을 불러 난잡한 파티를 즐기는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64년 11월 20일 윌리엄 설리번 FBI 국장보가 익명으로 써 킹 목사 부부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7]

“ 킹, 당신의 천한 계급을 생각해 미스터나 목사, 박사 따위의 호칭은 붙이지 않겠다. 당신은 완전한 사기꾼이며 우리 흑인 모두에게 큰 짐이 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 나라의 백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협잡꾼이 많지만 지금 어디에도 당신과 맞설 협잡꾼은 없다고 확신한다. 다른 모든 사기꾼들과 마찬가지로 너도 끝장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8] ” — 윌리엄 설리번 FBI 국장보가 익명으로 써서 보낸 편지 전문

이때 다른 여성과 정사중인 킹 목사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가 함께 전달됐다.[7] 후일 설리번은 회고에서 “조사 결과, 킹은 창녀 두 명과 함께 밤을 보낼 때가 많았고, 술과 음담패설이 난무하는 파티를 수시로 벌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12월 10일에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노벨 상을 전달받고 동시에 미화 5만 3천 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한편 흑인인권 운동을 비롯한 여성운동, 인권 운동을 적색분자가 정치적으로 이용, 선동한다는 에드가 후버의 주장을 색깔론이라고 반박하는 동시에 흑인의 분리 독립 운동과 폭력적인 시위에 반대하면서 맬컴 엑스 등과도 갈등하게 된다. 맬컴 엑스와의 갈등은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미화원 파업지도와 암살 [ 편집 ]

그는 맬컴 엑스 등의 활동은 극단적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는 내 양심을 죽이느니 차라리 앨라배마의 고속도로에서 죽겠다’며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협박이나 일부 백인 지도자들의 타협 주장 역시 거절하였다. 1968년 테네시주의 흑인 청소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지원하러 그해 4월 멤피스로 내려와 모텔에서 생활하며 흑인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동참하였다. 당시 루터 킹 목사는 “주님의 자녀들인 여러분들이 적절한 임금을 받고자 한다면, 투쟁해야 합니다”라고 파업투쟁을 지지하는 설교를 했다.

한편 그를 암살하기 위해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사람을 보냈다는 파다한 소문이 그의 귀에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고 답했다. 4월 3일 열린 흑인 청소노동자 모임에서도 이 소문을 접한 흑인 청소노동자들은 그에게 피신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킹은 “모든 사람이 그렇듯 나 역시 오래 살고 싶다. 나라고 왜 오래 살고 싶지 않겠나?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고 싶다”라고 답했다.

베트남 전쟁 장기화 시기인 1968년 4월 4일 멤피스의 한 모텔 2층 발코니에서 미리 잠입해 있던 테네시 출신 백인 우월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제임스 얼 레이가 쏜 총에 킹 목사는 머리를 맞고 죽었다. 옆방에 있던 친구들이 총소리를 듣고 달려왔을 때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근처 다른 방에서 침구와 지혈제를 가져와 조치했지만, 그는 과다 출혈로 병원 이송 도중 구급차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킹 목사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선포하였다.

사후 [ 편집 ]

워싱턴 D.C.와 다른 도시들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흑인들은 도시 중심부에서 방화와 건물, 차량 파괴, 약탈 등 폭력시위를 했지만 그의 뜻이 아니라는 일부 흑인 지도자들의 자제 요청과, 수천명의 군인, 경찰이 출동하면서 시위대는 저절로 해산되었다. 제임스 얼 레이는 바로 배편으로 영국으로 도망쳤으나 런던 시내에서 그를 본 목격자의 제보로 체포되어 다시 테네시주 멤피스로 송환되었다. 1968년 레이는 멤피스 법원에 회부, 1969년 징역 99년형을 최종 선고 받은 뒤 1998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폭력 노선과 흑인 분리 독립을 주장하던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달리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많은 지지자를 획득했고 흑인도 인간이라는 시각의 확산을 촉진시켰다. 1986년부터 미국에서는 그를 기려 그의 생일(1월 15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정하고 연방 정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사상과 신념 [ 편집 ]

비폭력 사상 [ 편집 ]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폭력에 반대하는 비폭력 사상가였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벌어지던 베트남 전쟁을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 “지금 미국 청년들이 아시아의 정글에서 전투를 하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너무나 막연하기 때문에 전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들의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이공 정권과 그의 동맹세력도 명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미국 흑인병사들은 민주주의를 누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

[5]

비폭력 저항과 인종차별 철폐 운동 외에도 근대 약소국의 식민지 해방 운동 등에 대한 자료를 찾으며 인권운동의 전개과정에 대해 오래도록 연구하였다. 또한 그는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는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사상에 적극 공감하였다.

그러나 모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그와 동의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과격파는 흑인 이슬람 지도자인 맬컴 엑스를 지지하며 그의 비폭력 흑인운동에 반발했는데, 왜냐면 그들에게 온건한 성격의 흑인인권운동은 백인들과의 타협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생 때 부모님으로부터 대학교 입학선물로 자동차를 선물받을만큼 부유한 집에서 자란 킹 목사의 성장환경과 그의 온건민권운동은 일부 흑인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9]

민주사회주의자 [ 편집 ]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세상에는 왜 빈곤이 있는가?”라는 고민을 했고, 대학생 시절에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선언, 자본론 등을 읽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유물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마르크스의 사상에는 공감을 했던 민주사회주의자였다. 오히려 자본주의야말로 유물론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10]

논란과 의혹 [ 편집 ]

성추문 의혹 [ 편집 ]

재클린 케네디는 그가 여성들과 섹스파티를 즐긴 위선자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유명한 명연설을 하기 전날 밤, 여성들을 섹스파티에 초대하기 위해 호텔방에서 전화를 걸어댔다는 연방수사국(FBI)의 도청 정보를 언급하기도 했다.[11] 2011년 9월 언론에 공개된 내용에 대해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따르면 재클린은 “마틴 루터 킹의 사진을 볼 때마다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12]

재클린 오나시스는 킹 목사를 위선자(phoney)라고 평가했다.[11] 1964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미국의 역사학자인 아서 M. 슐레진저(Schlesinger)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하였다.[11] 이는 보스턴의 케네디도서관 소장고에 다른 자료들과 함께 보관되다가 2011년 9월 공개되었다.

불륜 사건 [ 편집 ]

1968년에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치과의사의 부인과 간통, 성관계를 맺어오다가 FBI에 발각되었다. 1968년 FBI가 도청한 킹 목사의 한 전화통화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흑인 치과의사의 아내였다.[13] 그의 불륜을 눈치챈 것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야구팀의 스타 선수인 이먼 돈 뉴컴의 제보에 의한 것이었다.[13] 돈 뉴컴 등 야구선수들의 제보를 받은 에드거 후버는 바로 킹의 전화를 도감청하고 사람을 붙였다.

후버는 보고서를 작성, 1968년 2월 20일자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 킹 목사는 1962년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유명한 흑인 치과 의사의 아내와 불의의 성관계를 맺고 있음. 킹 목사는 전기의 여인을 매주 수요일 장거리 전화로 불러내며 전국내 각 도시를 전전, 밀회하고 있음. ” — 에드거 후버의 보고서[13]

후버의 보고서에는 “한번은 뉴욕 시 뉴욕시티호텔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고 술이 약간 취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그 여자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안하면 13층 호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겠다고 위협했고 성관계를 하자고 위협했다.[13]”이라는 보고도 들어 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킹 목사의 성적 일탈에 대한 의혹의 근거는 FBI 파일밖에 없다. 증인도, 다른 증거도 없어왔고 오직 FBI 파일이 현재 유일한 의혹의 근거이다.

하지만 파일은 2027년까지 봉인되었다. 이 봉인이 풀린다 할지라도 이 파일의 진위여부는 다시 따져보아야하며, 법적인 효력은 이미 전무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도청이라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얻었기 때문이다.

논문 표절 의혹 [ 편집 ]

1950년대의 그의 논문 중의 일부는 다른 박사학위 논문이나 자료의 내용과 유사하여 표절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FBI의 도청 논란 [ 편집 ]

재클린 케네디가 그의 사생활을 폭로, 비판한 것과 관련하여 FBI가 그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11] 재클린 케네디가 입수한 마틴 루터 킹의 섹스파티는 연방수사국(FBI)의 도청 정보를 통해 입수됐다.[11] 연방 정부의 도감청 행위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또다른 논란거리가 되었다.

후버는 64년 10월 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예의 그 정사 장면이 녹음된 테이프를 언론사에 보냈다. 이를 보도한 신문사는 없었다.[6] 그러자 후버는 녹음 테이프를 아내인 코레타 스콧 킹 앞으로 보냈지만 그 무렵 킹은 ‘공작 정치’가 아닌 암살자의 총탄에 의해 39세의 생애를 마감했으며, 정작 후버 자신이 공작 정치가 탄로나 파멸의 길을 걸었다.[6]

기타 [ 편집 ]

재클린 케네디 녹취록에서 “그가 남편(존 F. 케네디)의 장례식 날 킹 목사가 술에 취해 있었다”고도 했다[14]

가족 [ 편집 ]

부인 코레타 스콧은 작가이면서 역시 흑인 운동, 인권 운동가로 활동했다. 딸 욜란다 데니사 킹 역시 인권운동가였다.

외할아버지 : 애덤 대니얼 윌리엄스(Adam Daniel Williams, 1861년 – 1931년 3월 21일)

외할머니 : 제니 설레스트 윌리엄스(Jenny Celeste Williams,시집 오기 전 본명은 제니 설레스트 파크스(Jenny Celeste Parks), 1873년 4월 – 1941년 5월 18일) 외증조부 : 윌스 윌리엄스(Willis Williams, ? – 1874년) 외증조모 : 루크레시아 대니얼스(Lucrecia Daniels) 외고조부 : 윌리엄 넬슨 윌리엄스(William Nelson Williams, 1804년 – 1863년)

진외증조부 : 짐 롱(Jim Long, 1844년 – ?), 할머니 다니엘라 린시 킹의 친정아버지

진외증조모 : 제인 린지(Jane Linsey, 1853년 – ?)

외외증조부 : 윌리엄 파크스(William Parks, 1825년 – 1900년(?)), 외할머니 제니 설레스트 윌리엄스의 친정아버지

외외증조모 : 패니(Fannie)

저서 [ 편집 ]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1958)

《사랑할 힘 Strength to Love》(1963)

《우리 흑인은 왜 기다릴 수 없는가 Why We Can’t Wait》(1964)

《흑인이 가는 길》(1967)

한국어 번역서 [ 편집 ]

1989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마틴 루터 킹 목사 설교집, 채규철, 김태복 옮김.예찬사)

2001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마틴 루터 킹 목사 전기), ISBN 978-89-7439-325-0

2005년,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 ISBN 89-90854-39-3

ISBN 89-90854-39-3 2005년, 양심을 깨우는 소리

관련 항목 [ 편집 ]

출연 작품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1964년) 장소 미국 형태 국경일 날짜 1월 셋째 월요일 2021년 1월 18일 ( 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 ) 2022년 1월 17일 ( 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 ) 2023년 1월 16일 ( 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 ) 2024년 1월 15일 ( 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 ) 빈도 해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영어: Martin Luther King, Jr. Day)은 미국의 연방 공휴일로, 1월 셋째 월요일이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를 기리기 위한 날이다.

개요 [ 편집 ]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정한 미국의 축일이다. 흑인개방운동 지도자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던 킹 목사가 태어난 날인 1월 15일과 관련, 1월 세 번째 월요일로 정해졌다. 1968년 4월 4일, 킹 목사가 테너시 주 멤피스에서 암살당한 이래 그를 기념하는 축일을 정하자는 법안이 제기되다가 1986년부터 시행되었다. 이날은 연방 축일이므로 주(州)와는 직접 관련이 없으나 이미 24개에 달하는 주에서 축일로 정하는 입법 조치를 취했다.[1]

[인물 아메리카] 인종 평등의 시대를 꿈꾼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인종 평등의 시대를 꿈꾼 지도자 대기권 밖을 비행한 최초의 미국 우주인 앨런 셰퍼드에 대해 알아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수백 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미국의 인종 평등에 큰 진전을 가져다준 비폭력 민권운동 지도자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미국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애틀랜타에 있는 무어하우스 대학(Morehouse College)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크로저 신학대학(Croz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때 그는 인도의 무저항주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의 철학에 매료됐습니다. 킹 목사가 비폭력 투쟁을 원칙으로 한 건 간디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어 보스턴대학(Boston University)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자가 되는 것이 사명이라 여겼던 마틴 루터는 1954년부터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침례교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인종차별 반대 투쟁의 도화선이 된 시내버스 좌석 사건이 벌어진 건 바로 그 다음 해였습니다. 당시 몽고메리의 버스 제도는 백인이 앞에 앉고 흑인은 뒤에 앉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 중간에 흑백 공용석이 있었지만, 앞의 백인 자리가 모자라면 그것도 백인한테 내줘야 했습니다.

1955년 12월 1일, 재봉사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가던 로사 팍스라는 흑인 여성이 중간석에 앉았습니다. 그러다 백인 승객이 올라타자 운전사가 팍스 여인에게 자리를 내주고 뒤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팍스 여인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노 (No)”라고 하며 버티고 앉아 있었습니다.

팍스 여인은 규정을 어긴 죄로 체포됐습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이 앨라배마에 쏠렸습니다. 평소 흑인 차별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킹 목사는 지역 흑인 지도자들은 규합해 몽고메리 시내버스 거부 운동을 벌였습니다.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한 킹 목사는 살해 위협도 여러 차례 받았고,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백인들은 버스 안타기 운동이 곧 시들해질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장장 382일 동안이나 계속됐습니다. 1956년 11월, 미국 대법원은 몽고메리 시내버스 시스템의 인종 분리 제도는 불법이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킹 목사와 그의 동료들의 투쟁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킹 목사는 미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미국 남부 여러 곳에서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평화적인 시위가 줄을 이었습니다. 민권운동은 급속도로 번져 ‘남크리스천 지도자 대회’라는 조직이 탄생했고, 그 회장에 킹 목사가 선임됐습니다.

1963년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는 식당이나 학교의 흑백 차별 금지를 요구하는 대규모 행진이 벌어졌습니다. 경찰은 물대포를 쏘고 개를 풀어 위협하며 폭력적인 진압에 나섰습니다. 이 충돌에서 킹 목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체포됐습니다. 민권운동 단체들은 버밍햄 시내의 상점 불매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운동은 국제적인 뉴스가 된 가운데 지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백인들은 결국 민권운동가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버밍햄 승리는 민권운동의 분수령이었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는 인종 평등에 대한 전국적인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전국적인 시위를 추진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곳 워싱턴 D.C.에서 벌어진 대행진이었습니다. 1963년 8월 벌어진 이 행진에는 약 25만 명이나 되는 군중이 참여했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 워싱턴에서는 여러 가지 행진이 벌어졌지만, 이처럼 대규모 행진은 처음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킹 목사는 바로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연설을 한 것입니다.

1964년, 드디어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민권법에 서명했습니다. 이 법은 공공장소에서의 인종 분리나, 피부색, 종교, 성, 또는 민족을 이유로 고용에서 차별을 하는 행위는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어서 투표권법, 평등 주택법 등이 연속 제정되면서 선거, 거주, 주택 구매 등에서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킹 목사는 민권법이 제정되던 해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킹 목사는 수상 연설에서 ‘나에게 이 상이 주어진 것은 우리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정치적 도덕적 질문에 비폭력 운동이 해답이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는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는 차별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1968년 4월 4일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의 총을 맞고 숨졌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39세. 그러나 그가 뿌려놓은 밑 거름에 힘입어 2009년에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까지 등장하는 커다란 변화가 일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값지게 사느냐라고 역설했던 마틴 루터 킹, 그는 억압받고 차별당하는 모든 사람의 희망이었습니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미국에서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1월 셋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데이로 제정해 이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박영서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녹취] 마틴 루터 킹 목사 연설

1963년 8월 28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워싱턴 기념탑 앞 광장에는 수십만 명의 군중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지 100주년을 기념해 모인 사람들이었는데요. 그들은 공평한 일자리와 자유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나에게는 꿈이 있다”던 그 유명한 연설이 있었습니다.

[녹취] 마틴 루터 킹 목사 연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그 옛날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소유주들의 후손들이 형제가 되어 함께 앉아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 언젠가 자신의 네 자녀가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오리라는 꿈을 갖고 있다고 포효합니다.

[녹취]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현장음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그 꿈은 그로부터 50여 년 후, 이뤄집니다. 2009년 1월, 미국 건국 사상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출생, 그리고 이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29년 1월 15일, 미국 남부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에서 침례교 목사인 마틴 루터 킹 시니어와 어머니 앨버타 윌리엄스 킹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원래 이름은 마이클 킹이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아버지가 기독교 종교개혁가이자, 신학자인 마틴 루터에게 감명을 받아 자기 이름도 마틴 루터 킹으로 바꾸고, 아들 이름도 마틴 루터 킹으로 바꿨습니다. 킹 목사는 나중에 코레타 스콧이란 여성과 결혼하고요. 사이에 4명의 자녀를 뒀습니다.

“킹 목사는 언제부터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걸까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목사의 아들로, 당시 다른 흑인에 비하면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또래 흑인 아이들과는 달리 교육도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어릴 때 한 백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너는 유색인종이니까 우리 아이와 놀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킹 목사가 처음으로 인종차별에 눈을 뜨게 된 사건이었는데요. 링컨 대통령이 흑인 노예해방을 선언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당시 미국 사회 곳곳에는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관습이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특히 킹 목사가 나고 자란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는 남부 지방으로 흑인들을 차별하는 관습이 깊게 뿌리 박혀 있었죠.

킹 목사는 어릴 때 남달리 영특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애틀랜타 시에 있는 모어하우스 칼리지를 15살에 들어가 4년 후 졸업하죠. 이때 기독교와 인종 문제, 그리고 정치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됩니다. 킹 목사는 이후 크로저 신학교를 거쳐, 보스턴 대학교에서 26살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 킹 목사가 본격적으로 흑인 인권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있다고요?”

네. 킹 목사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학자로서 경력을 더 쌓고 싶어 했죠. 하지만 1954년, 남부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 있는 한 교회가 목사로 청빙하자 이를 수락하고 앨라배마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뒤 킹 목사가 있는 바로 그 몽고메리 시에서 미국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 하나가 벌어집니다. ‘로자 팍스’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 앞자리에 있는 좌석을 백인에게 내어주지 않고 실랑이를 벌이다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앨라배마 시에는 버스의 앞자리는 백인이, 뒷자리는 흑인이 앉는 관행이 있었거든요. 이 여성은 법적 소송을 벌였고 흑인 사회 지도자들은 이런 인종차별적 행태에 항의해 버스 안 타기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리고 킹 목사가 이 운동을 이끌어 나갈 주도적인 인물로 선출됩니다. 그리고 버스 안 타기 운동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됩니다.

“킹 목사를 왜 위대하다고 하는 걸까요?”

사실 당시 다른 흑인 지도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지도력도 있고 흑인 사회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을 테죠. 말콤 X라는 이름의 흑인 지도자도 그런 사람 가운데 1명인데요. 그런데 킹 목사가 찾은 방법은 바로 비폭력이었습니다. 킹 목사는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을 뿐, 비폭력만이 힘없는 흑인사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자 탄압하는 자들의 굳어버린 양심과 도덕을 일깨울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믿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일부 흑인들로부터는 무기력한 타협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요. 백인우월주의자로부터는 온갖 협박과 테러, 방화까지 당합니다.

하지만 킹 목사는 이런 비판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비폭력과 사랑만이 불의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요. 그의 이런 신념은 마침내 많은 백인의 양심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실제로 1963년 8월 워싱턴 대행진에 참가한 군중 가운데 20%가량은 백인으로 추산된다고 하고요. 1965년에는 마침내 위대한 결실도 맺죠. 바로 린든 존슨 대통령이 흑인들의 참정권을 허용하는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흑인들도 투표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킹 목사 암살,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데이”

1963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합니다. 킹 목사는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최초의 흑인이었죠. 그리고 이듬해인 1964년, 킹 목사는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역대 가장 젊은 수상자였습니다. 하지만 1968년에 킹 목사는 한 극우파 백인에게 암살당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39살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후 미국에서는 그를 기리는 연방 공휴일을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계속 있어왔습니다. 그러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탄생을 기리는 연방 공휴일이 공식 지정됩니다. 미국에서 개인을 기리는 연방 공휴일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미국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밖에 없고요. 민간인, 그것도 흑인을 기려 연방 공휴일이 지정된 건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해마다 마틴 루터 킹 데이가 되면 미 전국 곳곳에서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펼쳐집니다.

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박영서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 : 링컨 기념관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963)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에 서명 한지 약 1백 년 되는 1963년 8월28일 마틴 루터 킹이라는 이름의 한 청년이 미국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설명하기 위해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 대통령 기념관의 대리석 계단을 올라갔다.

20만 명이 넘는 흑인과 백인들이 경청하러 왔다. 그들은 비행기로, 자동차로, 버스로, 기차로 그리고 걸어서 왔다. 그들은 흑인의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기념관의 계단에서 들은 꿈은 한 세대의 꿈이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민주주의의 약속을 현실로 실현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어둡고 쓸쓸한 인종 차별의 골짜기로부터 분기하여 인종적 정의의 햇볕 길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흑인에게 시민권이 주어지기 전까지 미국에는 안식도 평온도 없을 것입니다. 정의의 밝은 날이 오기까지 반란의 회오리바람이 계속 우리 국가의 기반을 뒤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의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는 여러분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당한 지위를 얻는 과정에서 우리가 부당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흑인 사회를 집어 삼켜버린 놀라운 새 투지가 모든 백인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 그들이 이 자리에 참석한 사실이 입증하듯, 우리의 많은 백인 형제들은 그들의 자유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자유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의 영예는 보상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 일합시다. 미시시피 주로, 앨라배마 주로, 루이지애나 주로 그리고 우리 북부 여러 도시의 빈민가와 게토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변화될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변화될 것임을 아십시오.

나는 오늘 나의 여러 친구들에게 말하노니, 나는 어려움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 박은 꿈입니다.

나는 언젠가는 이 나라 국민들이 분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자명한 진리로 삼는다”는 이 나라 국민 신조의 참 뜻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이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과 함께 형제애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4명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 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 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이 꿈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유가 뉴햄프셔주의 거대한 언덕 위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뉴욕주의 강대한 산들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펜실베이니아주의 앨리게니 산맥으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콜로라도 주의 눈 덮인 로키 산맥으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캘리포니아 주의 굽이진 능선으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가 조지아 주의 스톤 마운틴에서도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미시시피 주의 모든 언덕과 둔덕으로부터도 울리게 합시다. 자유가 모든 산허리로부터 울리게 합시다.

우리가 자유가 울리게 할 때, 모든 크고 작은 마을에서, 모든 주와 모든 도시에서 자유가 울리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자손들인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방들, 신교도와 구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영가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마침내 해방되었도다!”를 노래 부를 수 있게 될 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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